공(公)의 이름(諱)은 인경(仁敬)이시며 별호는 아천(雅川)이시니 태종(李朝太宗)때 진사(進士)에 삭주부사(朔州府使)를 지내셨으니 휘 당(瑭) 첨의평리사사 석성부원군(僉議評理司事 碩城府院君)의 四세손이시고 휘 원보(元寶) 익대공신형조판서함산군의 아드님이시다. 공께서 일찍이 벼슬을 하시매 집안일과 같이 하셨고 백성을 사랑하시기를 아들과 같이 하사 덕의 교화가 고루 베풀어져 온 고을이 모두 칭송하였다. 그러나 공의 평소 뜻이 겸손하고 공경하며 검소하여 평화와 명예로써 오래하시고져 않으신고로 결연히 온양 동산리 은퇴하시었다. 낮에는 들에 나가 밭갈이 하시고 밤에는 돌아와 글을 읽으시면서 항상 자제들에게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선비가 몸을 닦아 장차 남을 다스리고져 할진대 오직 평화시대에는 마땅히 물러나 사양함으로써 의(義)를 삼고 만약 국사가 어려움이 있을 때는 마땅히 나아가 의(義)를 지킬 것』이라고 하셨다. 후세의 사람들이 다만 공의 벼슬이 낮았던 것만을 논하고 공의 원대한 경륜을 몰라주니 이는 소위 귀로 듣는 것만 귀히 여기고 안목은 낮고 천함이라 하겠어서 잘 인품을 알지 못함이라 하겠으니 더구나 어찌 돌에 새겨서 그 정신을 길이 전함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불행히도 세상이 여러번이나 변천하고 자손들이 적고 나타나지 못하여 비석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게 되어 땅에 묻혀 지금에 이르기 이미 五백여년이나 되었다. 후손 예수(禮洙) 춘식(春植) 장환(章煥) 월환(月煥)등 여러 명이 족보를 닦는 일로 인하여 공의 사적을 보매 분연히 감동되어 곧 온양 동산(銅山)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예전에는 묘비가 있었다는 전설을 알아내어 두루 땅속을 헤아려 겨우